에드바르 그리그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9세에 첫 피아노곡을 작곡했고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찍부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어머니는 음악협회 '하모니'의 음악회에 피아니스트로 종종 출연했다. 음악회를 통해 접한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관현악 레퍼토리와 실내악 레퍼토리는 훗날 그가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15세에 그리그는 부모를 떠나 라이프치히로 갔고 그곳에서 카를 라이네케와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공부했다. 베르겐으로 돌아온 뒤에는 슈만의 시적인 음향 세계에 영감을 받은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알렸다. 젊은 음악가는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닐스 빌헬름 가데의 제안으로 교향곡 1번을 작곡했는데, 마지막 세 악장이 1864년에 코펜하겐의 콘서트 소사이어티 '에우테르페'에 의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덴마크에서 그리그는 리카르드 노르드로크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점차 현지의 민속 음악에 기반한 “노르딕” 음향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올레 불가가 큰 힘이 되어 주었는데, 그를 통해 접한 많은 민요와 하르당에르 피들의 예술이 그리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의 전 지명)로 이주하여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교사로 활동하다가 국가 장학금의 도움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 특히 독일에 만연하던 “노르웨이주의”라는 비난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자기 길을 갈 힘을 얻었다. 귀국하고 나서 1871년에 크리스티아니아에 이 도시 최초의 전문 오케스트라인 음악협회를 창단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노르웨이 정부가 1874년에 그리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그해에 그리그는 입센의 드라마 〈페르귄트〉를 위한 무대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크리스티아니아와 베르겐을 오가며 살았다. 1907년 사망 당시 그리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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